허윤숙의 ‘당신의 인상을 인상하라!’

100세 시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 입력 : 2018.03.02 10:39:00    수정 : 2018.03.02 18: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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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픽사베이



어릴 때 아빠에게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남진이라는 가수가 방송에 나오기만 하면, 숟가락을 입에 대고, ‘저 푸른 초원 위에~~’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열광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부모님 앞에서 중대 발표를 해버렸다.

나중에 크면 남진이라는 가수와 꼭 결혼하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아빠가 둘의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인생 최초로 사랑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왜 나를 그렇게 늦게 낳았느냐고 따졌더니, 아빠가 엄마를 늦게 만나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 아빠를 둘 다 원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난 것에 대해 통곡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남진 아저씨는 20대 중반쯤 되었고 나는 여섯 살이었다. 그 후로 중학생이 된 후에는 20대 청년 가수 조용필한테 푹 빠져버렸다. 그 당시 조용필 씨는 큰 인기에 힘입어, 유지인 씨와 함께 <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왔다. 나는 참고서를 산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용돈을 타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하교 후 친구랑 교복을 입고 영화관 앞에 길게 줄을 섰다. 그때 한 중년 아저씨께서는 혀를 쯧쯧 거리시며, “중학생들이 벌써부터 무슨 그 사랑이 한이 된다고...” 하셨다. 사실 그 아저씨의 질책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끔 영화관에 출두하시는 학생부장 선생님께 들킬까 봐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30년이 넘게 훌쩍 지났다. 나는 이제 50대가 되었지만, 좋아하는 가수는 여전히 20대 남자 가수다. 나는 지난 주말에 딸과 함께 정승환이라는 젊은 남자 가수의 팬 사인회를 다녀왔다. 정승환은 우리 모녀가 동시에 좋아하는 유일한 가수이기도 하다. 또 요즘 젊은 가수들 중 드물게 정통 발라드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에 나이에 상관없이 고루 사랑받는 가수다. 그 가수가 최근 첫 정규 앨범을 내면서 사인회를 연 것이다.

그곳에는 10대 청소년부터 나보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이 와 있었다. 그 가수 팬 카페에는 60대 후반이신 분도 많고 80대 할머니 팬도 있다. 아마 이전 시대였다면 노망이 들었다고 핀잔을 들었을 나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50대만 되어도 할머니 소릴 들었다.

나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그 나이에 맞는 감성이 설정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50이 넘어도 여전히 가슴이 설레고 곧잘 감동하는 지금의 나는, 10대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않다. 좋게 말하자면 감성적인 것인데, 사실 철이 덜 들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확실히 이전 시대에 비해 소년, 소녀 감성의 중·노년이 부쩍 늘었다.

중년, 노년이 바뀌고 있다. 이전 시대엔 여자의 경우 중년이 되면 그냥 ‘아줌마’, 나이가 더 들면 ‘뒷방 늙은이’였다. 그런데 요즘 여성들은 달라졌다. 일단 편리한 도구들 덕분에 가사노동에 전처럼 얽매이지 않는다. 또 많은 여성이 직업을 갖는 등 사회 참여도가 높아졌고, 남자 못지않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전보다 수명이 늘어난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세련된 여성이 많다.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듯 실버 모델들이 생겨나고 있다. 서양에서는 더욱 활발한데, 최순화 동덕여대 교수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과거와 달라졌기에 할머니 모델을 내세우는 광고가 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전에는 노인이 수동적인 약자였으나, 요즘은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젊은 할머니가 늘면서 돌봄의 대상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고 한다.

이 할머니 모델들은 사진 작업을 할 때 자신의 주름살을 없애지 말라고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훈장이자 연표인 주름은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사뭇 당당하고 섹시하기까지 하다.

원로 가수가 된 남진 씨가 콘서트를 한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재 나는 겨우 20대 초반의 정승환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더 좋아하고 있다. 여섯 살 때 품었던 연정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해 남진 씨에게는 미안하다. ‘사랑은 원래 움직이는 것’이라고 당당히 외쳐보기도 한다.

나는 아마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창이나 트로트보다는 젊은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를 들을 것 같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자신의 열정이나 감성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면 이제,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허윤숙 작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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