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의 그림극장

자아의 사투가 낳은 진주 - 권오상 작가와 영화 <샤인>

  • 입력 : 2017.08.16 17:45:13    수정 : 2017.08.16 17: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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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의 지드래곤 Untitled GD, 2015, C-print, Mixed media, 176x105x380cm 원석들 Stones, 2015, C-print,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두 인물이 사투를 벌인다. 목에 겨눈 창끝에서 금방이라도 붉은 선혈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둘은 같은 얼굴이다. 공교롭게도 창은 뮤지션의 상징인 마이크 형상을 하고 있다. 아이콘으로 불리는 유명 뮤지션이 자신의 목소리를 관객에게 전하는 마이크로 또 하나의 자아를 죽이고 있는 장면이다.

작품의 탄생은 묵시록에서 출발한다. 「요한 묵시록」 12장 7-8절에서는 대천사 미카엘이 용의 모습을 한 사탄과 대치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미카엘은 루시퍼의 호적수로 둘의 싸움은 긴 역사 속에서 조각과 회화로 탄생하곤 했다.

사진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확립하며 한국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작가 권오상은 <루시퍼와 싸우는 대천사 미카엘> 고전 조각들에 영감을 받아 <무제의 지드래곤>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는 팬들이 사진을 수집하듯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수 천장의 사진으로 유명 뮤지션 지드래곤의 모습을 탄생시켰다. 샴 쌍둥이처럼 한 자아에 내재되어 있는 선과 악의 대결은 10대들의 아이콘으로 살아가는 유명 뮤지션이 경험할 창작의 고통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세간의 이목 속에 수없이 증식하는 자신의 모습과 대립하는 자아의 모습은 창조자의 서글픈 숙명처럼 비장하다. 싸움이 격정에 치달을수록 고통 속에 몸서리치는 자아는 괴물이 되어 하나의 자아를 먹어치운다. 휘황한 무대와 공허, 열정과 좌절, 환희와 두려움, 선과 악은 결국 한데 얽혀 서로의 목을 조르는 실타래가 된다.

“난 충분히 미쳤어요.”

흔히 천재 예술가에게는 필연적으로 삶의 질곡이 존재 할 것이라 짐작하듯 영화 <샤인>은 실존하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순탄치 않은 삶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초라한 모습으로 레스토랑에 침범해 소란을 피우는 한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남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걸인으로 보이지만, 실은 한때 유망한 천재라 평가받으며 맹위를 떨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이다.

데이비드의 삶이 무너진 데에는 자신을 소유물로 여기며 왜곡된 사랑을 표현했던 아버지의 탓이 크다. 그 또한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하고 싶은 음악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데이비드에게 강요되는 가족의 울타리는 공감을 주지 못한 채 데이비드를 옥죄는 포박이 되고 만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데이비드를 폭력으로 막아보려 하지만, 아들은 결국 가족을 떠나 영국 왕립음악학교에 둥지를 튼다. 데이비드는 전설적인 교수 세실 팍스를 만나고, 천재를 알아본 세실 교수의 지도하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일생일대의 콩쿨을 준비한다.

남들보다 손이 컸다고 알려진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신체적 장점을 최대치로 활용하듯 연주자에게 난공불락의 화려한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세실 교수의 말처럼 “미치지 않고는 연주할 수 없는 곡”을 연주하기 위해 데이비드는 자신과의 대결을 벌인다. 어쩌면 자신을 지워가며 천재를 깨우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고양이 통조림을 먹고 바지를 입지 않고 다닐 만큼 정복의 대상인 피아노에만 몰입했다.

공연 당일, 무대 위에서는 미카엘과 루시퍼의 싸움이 벌어졌다. 데이비드의 손끝이 건반에 미끄러질 때 마다 또 한명의 데이비드의 살점에는 피가 툭툭 터져 나왔다. 두 존재의 첨예한 싸움은 데이비드의 손끝, 땀방울, 얼굴 근육 하나하나에 묘사되었다. 곡이 격정으로 치달을 때에 한 명의 데이비드는 죽었고, 광기는 붉게 번져나갔다. 괴물이 된 자아에 잡아먹힌 데이비드는 완벽한 곡을 연주한 후 무대 위에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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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진 않아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지. 아 세상은 너무 신기해”

무대에서 쓰러진 이후 정신분열로 10여년을 병원에서 보낸 데이비드는 세상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우연히 두 번째로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데이비드는 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손의 기억을 따라 열정적인 연주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날을 계기로 레스토랑의 연주자가 되며 조금씩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데이비드였지만, 그를 이해하는 연상의 여인 길리안을 만나 결혼도 한다. 그리고 길리안의 헌신은 다시금 데이비드를 무대 위로 세우게 된다. 긴 시간을 지나, 비로소 자신을 만난 데이비드는 행복해 보인다.

패각에 모래알이 침투하면 조개는 자신을 공격하는 모래알과 사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수 없는 시간의 고통 속에 즙을 토해내고, 그 즙이 한 결씩 쌓여 종내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게 된다.

창작과 고통의 상관관계처럼 내면의 싸움은 고통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눈물의 끝이 눈물은 아닐 수 있다. 그 사투 속에서도 기꺼이 자아를 놓지 않고 인내하며 바라보는 시간을 통해 비로소 눈물은 진주알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가 김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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