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의 그림극장

언어 이전의 풍경 - 이이남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눈물>, 신카이 마카토의 <언어의 정원>

  • 입력 : 2017.03.22 21:45:49    수정 : 2017.03.22 21: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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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 관계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가. 서로의 사이에 놓인 무수하고도 구체적인 언어들이 곧 감정의 질량이라 정의하기는 어렵다. 때로 언어는 뚫고 나아갈 수 없는 투명한 유리 장막처럼 둘 사이의 공기를 가로지르고,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공기 사이로 감정은 팽창하기도 한다. 영화 카피에 등장한 ‘사랑 그 이전의 사랑’이 곧 그런 것이 아닐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언어의 정원’에 등장하는 고등학생 다카오와 스물일곱 여교사 유키코가 그렇다. 빛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작가의 별명처럼 영화는 비오는 공원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진 영화다. 비가 저렇게 청아했는지 새삼스럽고, 푸르게 부서지는 나뭇잎 햇살과 비와 무지개가 존재하는 미지의 공간들은 외려 스토리를 압도하는 클리셰로 보이기까지 한다.

다카오와 유키코는 비 내리는 신주쿠 공원에서 벤치에서 우연히 만난다. 구두 장인을 꿈꾸는 다카오는 비 오는 날이면 오전 수업을 빠지고 공원에서 구두를 스케치한다. 초콜릿과 맥주를 마시며 묘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연상의 여인 유키코는 다카오의 교복을 보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눈치 챈다. 유키코는 자신이 가르치는 시 한편을 읊어주며 힌트를 남기지만 다카오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둘은 곧 비오는 날마다 신주쿠 공원 벤치에서 만나기로 한다.

비는 영화를 아우르는 중요한 매개다. 그리워하는 마음은 있지만 비가 오는 날에만 만나기로 했기에 비오는 날을 기다리는 것. 연일 이어지는 맑은 날씨는 야속하게도 애를 태우지만 비라는 핑계가 없으면 둘은 만날 수가 없다. 모든 답답한 사랑이 그러하듯 둘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궁색한 핑계를 기다리며 마음 언저리를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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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눈물. C-print.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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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더욱 몽환적인 화면으로 재해석하였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가 가진 비밀스러움과 아련함은 작가의 손에서 극대화되었다. 온 몸을 던져도 끝내 창에 미끄러지고 마는 빗방울들 사이로 소녀의 형상이 보인다. 소녀는 아마도 울고 있는 것 같다. 부딪치고 흘러내리는 비는 또한 필연적인 시간성을 담아낸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가 풍기는 비밀스러운 냄새처럼, 소녀는 상처를 앓고 있던 유키코를 닮았다.

비 내리는 신주쿠 공원에서 다카오가 바라본 유키코는 그렇게 아련한 모습이었는지 모르겠다. 서로의 위치, 서로의 상황이 유리벽처럼 둘을 막아서고 둘을 매개하는 빗방울은 아련하게 지상으로 낙하했지만, 결국 관계 사이를 침투하지 못한 채 온 힘을 다해 맺혀 있곤 했다.

다카오는 걷는 법을 잊어버린 유키코를 위한 신발을 만들어주기로 한다. 유키코의 발 사이즈를 재는 장면은 둘 사이의 욕망을 암시하는 중요한 코드다.

유키코가 학교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다카오는 관계의 변두리를 배회하며 감정을 키워나간다. 함께 집에서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한 여름 어느 날, 둘은 지금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생각했지만 어렵게 터트린 다카오의 고백에 유키코는 소스라쳐 놀라고 만다. 사랑 이전에는 사랑이었는지 모르지만, 언어와 함께 시작하려는 ‘사랑’의 형태는 현실과 얼기설기 얽힌 육중한 덩어리가 되어 유키코를 밀어냈던 모양이다.

조금은 답답하고 싱겁게 돌아간 엔딩이지만, 그러한 결론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둘을 못내 이해할 수 있기에 영화는 아름답다. 진취적인 남학생과 걷기를 멈춘 여교사의 결론이 현실적이라고 짐짓 수긍하게 된다. 다만 전해지지 못한 단어들만이 수 천 개의 나뭇잎 사이로, 비에 젖은 눅진한 도로위로, 무지개가 영롱한 하늘위로 온통 흩어져 부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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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혹시 비라도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천둥소리만 들리고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도

나는 머무를 겁니다. 당신이 붙잡아 준다면"

둘이 주고받은 시는 만엽집(萬葉集)에 실린 시로, 서로를 배회하는 마음의 온도가 담겨있다.

[화가 김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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