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의 그림극장

내 상실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김기덕 영화 ‘피에타’와 이용백 작품 ‘피에타’

  • 입력 : 2016.08.03 14:06:35    수정 : 2016.08.08 0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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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드리워진 청계천의 후미진 골목 공구상점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에서 청계천은 자본주의 극단의 삶이 모인 모서리로 등장한다. 장면을 적당히 조리해내는 대신 불편한 리얼리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감독 특유의 화면에서 이름도 ‘강도’이며 별명은 ‘악마’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피에타’는 이러한 노골적인 수식어들로 원죄를 가진 존재임을 암시하는 주인공이 명료한 주제의식을 따라가는 영화다. 돈이 가장 중한 것은 아니라지만, 결코 무용한 것이라 말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을 처절히 버텨야하는 운명들은 사채 추심업자인 강도에 의해 속절없이 인생이 망가지고 만다. 고리대를 버티지 못해 프레스에 손목이 잘려나가거나 불구가 되고, 자살로 추락하기도 하지만 ‘악마’ 이강도에게 가책이란 없다.



그러던 강도의 삶에 느닷없이 엄마라는 존재가 나타난다. 흔한 경우 아들을 버린 친모는 장성한 아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현실적인 듯 하지만 강도는 모성으로 인해 속죄의 감정을 느끼며 변모해간다. 사실 엄마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강도에 대한 보복을 위해 강도를 찾아온 가짜였으나, 그녀는 곧 강도의 피안이요 구원의 존재가 된다. 섬뜩한 탐색을 통해 그녀가 엄마임을 믿고 난 후 강도의 삶은 바뀌어 간다. 급격하게 선해지는 강도의 삶은 그만큼 이해될만한 근거들이 나열되며 착실하게 가짜 엄마의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강도가 자신이 망가트린 삶을 찾아다니며 참회의 감정을 느끼는 동안, 가짜 엄마는 죽음을 준비하며 엄마를 잃은 슬픔으로 똑같이 복수하고자 한다. 그러나 비로소 강도 눈앞에서 자살하려는 엄마는 혼란스럽다. 죽은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강도를 향한 연민이 움튼 까닭이다. 페르소나를 쓰고 연기하다 가면과 자아를 혼동하게 되듯, 엄마는 죽은 아들로부터 왔다고 느낀 상실과 연민이 무대 위의 아들 강도에게로 전이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렇듯 영화를 아우르는 이중적 코드는 영화 곳곳에 침투해 있다. 바그너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트리스탄은 쾌락의 절정에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라 말하며 죽음과 쾌락, 무의식이 맞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잠이 든 채로 몸을 움직이는 강도를 엄마가 수음하는 장면은 쾌락과 죽음과 무의식이 동의어임을 내포하며 이들 곁으로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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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Pieta. FRP. 2500x2000x3200(mm). 2007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의미를 지닌 피에타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슬픔이 종교적으로 승화된 도상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이용백의 작품 ‘피에타’는 마리아의 자세를 취한 거푸집이 사이보그를 안고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의미를 은유한다. ‘피에타’라는 동일한 타이틀 하에 두 예술가가 풀어낸 작품은 상실과 연민의 실체를 담담히 묻는다.

거푸집은 형태를 찍어내기 위한 껍데기로, 네거티브의 내가 포지티브의 나를 안고 있는 형상이다. 육신이 정신을 안고 있듯 곧 마리아의 상실과 연민의 대상은 결국 나의 정신임을 드러낸다. 아들은 본디 자궁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있던 존재이듯, 거푸집은 필연적인 존재의 근거, 육신은 필연적인 정신의 모체다. 그러나 거푸집은 결국 버려져야 하는 운명임을 깨달을 때 작품은 죽음의 코드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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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서 온다고 믿었던 상실감은 실상 내 육신에서 분리된 내 정신의 것이듯, 죽은 아들을 내려다보며 찢어질듯 절규했던 엄마의 상실감은 실상 실체가 없는 내 정신이었다.

자신이 보는 앞에 목숨을 끊은 엄마가 가짜임을 알고 나서 강도는 자신이 망가트린 부부를 찾아가 속죄하듯 이들의 트럭에 육신을 묶어 자신을 향한 보복을 돕는다. 달리는 트럭에 매달린 시체의 혈흔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연상시키며 도로 위로 장엄하게 뻗어나간다.



강도에게 잔인하게 쫓기던 인물도, 가짜 엄마도, 강도도 죽었다. 끝내 영화가 퇴적된 곳에는 명료한 질문이 남는다. 감독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첨예한 경계를 묻고 있다.

자본주의의 말단이 상영된 은막에서 가장 불행한 삶은 누구인가? 나의 상실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씁쓸한 머뭇거림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실체’를 마주하는 것의 불편함 때문은 아닐는지. 마지막으로 작품은 결국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귓전에 속삭인다.

‘자비를 베푸소서’

[김지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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