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의 그림극장

위작이었던 사랑, 그 순간만큼은 진짜였을까 - 영화 ‘베스트 오퍼’

  • 입력 : 2016.07.14 14:20:06    수정 : 2016.07.14 14: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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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경매사의 명료한 음성이 경매장을 울릴 때 마다 공기는 더욱 타이트하게 응찰자들을 조여 간다. 영화의 배경은 긴장감과 흥분감이 짜임새 있게 직조된 미술품 경매장이다. ‘시네마 천국’의 감독 쥬세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제프리 러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베스트 오퍼’는 노장의 경륜을 증명하듯 섬세하고 탄탄한 연출력으로 이목을 끈 바 있다.

진품을 감별하는 탁월한 실력을 갖춘 세기의 경매사 버질 올드먼은 노년이 될 때 까지 여자를 사랑해 본 적 없는 외골수로 등장한다. 결벽증으로 수시로 장갑을 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혼자 식사를 하며 외부와의 단단한 벽을 치는 그에게 마음을 놓을 곳은 오직 오랜 수집품들이 걸려있는 컬렉션 룸이다. 룸에는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보카치오 보카치노의 ‘집시소녀’같은 명작들이 남자의 욕망을 대변하듯 숨 막히게 들어 차 있다. 올드먼은 화가 친구를 경매에 참여시키는 부정한 방식으로 수많은 여성의 초상 명화들을 수집했고, 시종일관 자신의 세계에 대한 고집과 강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올드먼의 운명은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 한통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진다. 은둔의 여인으로부터 저택의 물품들 감별 의뢰를 받게 된 것이다. 남자는 곧 광장공포증으로 12년간 외부에 나가지 못하는 여인에게서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이 동요함을 느낀다.

창백하고 오묘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랑을 몰랐던 남자에게 처음으로 찾아 온 신비감은 아마도 외부와 벽을 둘러치고 사는 자신과의 동질감이었을 것이리라. 한 폭의 그림처럼 마음을 줄듯 말듯 신비로움을 흘리는 여성에게 노 신사의 마음은 금세 포박당하고 만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여자. 그렇다. 그는 믿지 않았던 사랑의 진품을 발견한 것이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라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럽고 어여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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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엽. Red Moon. 2013

올드먼의 사랑을 차지한 이벳슨의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살결은 권경엽 작가의 작품 속 여인을 연상케 한다. 권경엽 작가는 상실과 결핍이 내재된 몽환적인 인물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캔버스에서 밖을 바라보는 여인은 관능적인 신비를 품고 있다. 매끈하고 창백한 살결과 호소하는 듯한 눈빛, 어딘가에는 고독과 상처를 숨겨두었을 것 같다. 그녀는 결핍으로 인해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남자를 이끈 것은 여자의 상처가 언뜻 비추어지는 관능의 문이었다. 그 푸르스름한 문을 열면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치유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보호본능이 느껴졌을 것이다. 트라우마로 둘러쳐진 견고한 성을 부수어 한 사람의 세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성취감은 서서히 남자의 눈을 멀게 했다. 하지만 선혈처럼 붉은 배경 속 관능적인 여인은 말이 없고, 여전히 비밀스럽기만 하다.

남자는 자신을 둘러 싼 모든 사람들의 덫에 의심 없이 걸려들어 평생에 걸쳐 모은 모든 작품을 잃고서야 여자의 사랑이 위작이었음을 깨닫는다. 작품들이 도난당한 화이트 큐브 안에서 한참을 소요하는 동안 “위조품은 진품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는 대사가 공간에 반복되어 울린다. 올드먼이 종종 했던 이 말은 곧 영화를 아우르는 가장 큰 복선이자 주제이기도 하다.

올드먼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머뭇거리며 마음에서 여자를 보내지 못한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잊지 말아달라던 여자의 말이 떠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어느 한 철 그녀가 말한 적 있었던 레스토랑으로 찾아가 망연히 여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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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먼의 사랑은 실패였을까. ‘베스트오퍼’란 진정 가치가 있을 때 던지는 경매 최고의 제시액을 의미한다. 남자는 인생에서 최고의 값을 치루며 한 여인의 사랑을 샀고, 사랑은 한 순간 폭풍처럼 몰려와 남자의 가슴 깊이 뿌리를 내렸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이 위작임을 알면서도 위작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진품의 면모를 탐색했다. 진품의 면모를 믿고 싶은 것은 한 사람에게 바친 사랑이 적지 않았음이고, 진실했음이며, 사랑의 순간만큼은 영원히 기억에 보존하고 싶은 최소한의 바람일 것이다.

가짜 사랑에서 진품의 면모를 발견한 대가는 값비싼 작품들이 아닌, 치유되지 않은 채 가슴을 저리게 할 사랑의 상흔이다.

다만 끝없는 그리움이다.

[김지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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