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우 이사장의 直talk

정민우 이사장의 直talk(60) 시즌 2 <본부장이 時代를 말한다> 제 11편 그리스

서구문화의 발원지 그리스(1) 알파고에 맞설 일류의 마지막 방패(防牌), 그리스 비극

  • 입력 : 2017.05.29 16:05:49    수정 : 2017.05.29 1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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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5년이면 로봇이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 스스로 그들에게 찾아갈 것이다.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말이다. <인공 지능이 아니라 인공 지성이다>

2045년이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의 지능과 감정을 다 합친 것보다 뛰어난 수퍼 알파고가 탄생한다고 한다. 계속되는 딥러닝으로 인공지능은 향후 인간 경험의 축적을 토대로 자체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공 지능(intellect)이 아니라 인공지성(intellience)이다. 그 동안 인간만이 가진다는 직관과 창의력을 가진다는 것. 이미 영화로 소개된 수많은 인공지능이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부터 ‘터미네이터 시리즈’ 그리고 최근 ‘에일리언 시리즈 최종편인 프로메테우스’에서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한 인공지능 로봇이나 ‘그녀’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목소리 연기만 인간의 감정까지 겸비한 운영체계까지 결국 영화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머지않아 인간의 지능은 당연한거고 감정까지 더 인간다운 인공지능이 나온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인류에게 우호적인 인공지능은 일단 매우 세련되어 보이고 유쾌하다. 프랑스 편에서 세련되다는 것은 절묘한 양면성이라고 했다. 인간의 부드러움과 여유와 기계의 예리함과 대담함을 모두 갖춘 모습이다. 결국 인류가 수 천년 동안 자식이나 연인 또는 타인에게서 바라는 면을 모두 부각시킨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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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AI는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 선과 악이 없다. <터미네이터 제너시스>

영화 ‘ 터미네이터2’에 나오는 로봇은 인간이 원하는 모습을 더 갖추었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갈린다. 로봇에게는 개념조차 없는, 인간에게나 존재하는 선과 악일텐데 말이다. 터미네이터 제너시스까지 나온 걸 보았는데 늙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는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로봇이다. 재밌는건 로봇의 표정에 인간적 비애가 느껴진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자신은 모를테지만 늙은 자신에 대한 외로움이 표정에서 묻어나오더라. 본부장은 2500명의 면접은 물론 자막이나 음향없이 등장인물의 표정만으로 전체 내용을 알아 맞추는 사람이다. 만약에 진짜 로봇이었다면 그런 표정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이 가지는 한계적 존재로서의 자부심과 허탈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편에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은 전 우주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편에 속하는 존재이면서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이 신을 동경하는게 아니라 영생을 살지만 보잘 것 없이 사는 신들의 모습에 불완전한 인간이 날리는 조소이다.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바다의 여신에게 율리시스는 천 년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천 년 동안 이름을 남기겠다고 했다. 그리스 인이 바라보는 인간의 멋은 이런 것이다. 한계적 존재가 가지는 이런 호기로움을 최고의 멋으로 치는 것이다. 외계에서 어떤 외계인이 오던지 어떤 신이 강림을 하던지 고대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가장 위대하진 않을지 몰라도 가장 멋진 존재였고 기꺼이 인간이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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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면 다 어린 20대들이다. 역사는 청년이 만드는 것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스는 인류에게 이야기거리 정도를 준 게 아니다. 그들은 2000년전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무한한 욕망의 너머를 내다보았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 이집트의 스핑크스나 바빌론(지금의 이라크)의 공중정원 그리고 그 밖의 우리가 고대 문명이라고 하는 곳을 두루 돌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상징물들을 직접 듣고 보고 기술하면서 그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본부장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본부장이 시대를 말한다’가 바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기술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묘미는 단순한 역사를 기술한 것이 아닌 시대를 정의하는 역사적 달관에 있다. 그리고 문체의 유연성이나 진실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바로 본부장이 지향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즉 책의 형식과 진행방식 그리고 보편적 상식에 근거한 작가 나름의 이론을 대단히 중요시 여겼다는 말이다. 본부장이 추정컨대 헤로도토스는 당시 그리스 상식의 표준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현재 그리스 로마 문화라고 일컫는 것은 결국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서 그리스인이 상식적으로 추구했던 최고 가치(크라운 주얼)를 가슴에 품고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기술하는 마음가짐과 사물을 보는 시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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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만 읽어 봐도 지혜가 밀려들어는 책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쇠망사>

정말 더도 덜도 없다. 그만큼 ‘역사’의 기술방식은 사실에 있어서는 매우 객관적이면서 진실에 있어서는 매우 주관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주관이 편협하다거나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이다. 왜냐면 심각하게 기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우 기분 좋게 써내려 간다. 그렇다고 들떠있다거나 가벼워 보이지도 않는다. 본부장이 전작에서 글로벌 시대에 심각하면 진다는 말은 나만의 개똥철학이 아니다. 이미 2000년전 부터 ‘역사’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진실이다. 이런 문체는 영국의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쇠망사’에서도 거의 똑같이 반복된다. 역사적 사실을 먼저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상식적 고찰과 작가의 진정성 있는 탄식 그리고 후대에 대한 실질적인 가르침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런 유연한 문체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 시절의 대문호 토마스 칼라일의 ‘프랑스 대혁명’에서도 뚜렷이 이어지며 명작 중의 명작으로 꼽히는 20세기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수상록’에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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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움직이는 인체의 아름다움에 오직 경외감만 들뿐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상>

우리가 영화 ‘300’ 시리즈에서 본 페르시아 전쟁은 헤로도토스 때문에 관람이 가능한 것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이기고 지고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페르시아가 이겨도 역사는 훌륭하게 흘러간다. 다만 페르시아가 왜 졌는지에 대해 후대에 대한 가르침을 그의 저서 ‘역사’에서 헤로도토스가 만약 수줍어해 하거나 머뭇거렸다면 그리스 로마 문화라는 것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공동체적 방향성의 상징이다. 기껏 조각품들이나 신전들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만약에 중요하다면 조각품이 무엇을 강조했느냐가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리스 조각품과 다른 문명의 조각품을 비교해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이 맞춰 보라. 유심히 본적이 있는가. 바로 인간의 몸에 대한 세밀한 묘사이다. 그런데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오히려 경건하다. 그들이 인간이라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바로 이거다. 경건함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를 정치 사회적으로 정의하자면 다양성이 최대한 인정되는 사회였다. 그래서 다양성을 훼손시킬 수 있는 인물은 그가 아무리 공동체의 영웅이라도 무참히 제거됐다. 영화 ‘300 제국의 부활’에서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를 구한 테미스토클레스나 로마 최고의 영웅 줄리어스 시저도 그렇게 사라졌다. 다양성이라는 말을 명심해라. 그것만이 인류가 만드는 모든 공동체가 번영으로 갈 수 있는 키워드인 것이다. 그것이 인정되었을 때 공동체나 조직은 피도 돌고 살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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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규모에서도 소리가 들릴 만큼의 음향 시설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 야외 극장>

우리가 어린 시절 본 동화에는 퀴리 부인의 스캔들도 안나오고 백설공주가 실제로는 새엄마를 죽인 나쁜 딸이란 것도 감춰왔다. 미화된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우린 그리스 신화도 그런 식으로 배웠다. 현실성 없는 매우 허무맹랑한 들으나 마나 한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는 앞에서 말했듯 불완전하지만 멋진 인간이 신을 조롱하는 취지의 위대한 인류의 문학작품이다. 한마디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아도취의 마음을 극히 완벽한 상대를 정해놓고 비교한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발상인가. 여러분들도 이런 건 반드시 써먹도록 해라. 경쟁자를 잡으려면 자기보다 훨씬 나은 대상을 고르라는 거다. 반대로 그런 위대한 인간이 현실에서 겪을 몰상식한 불행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하소연한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다. 지금 즐거운 사람은 비극을 주로 보고 지금 우울한 사람은 희극을 본다. 지금 괴로운 사람은 이전에 비극도 희극도 보지 않은 사람이다. 미리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듬지 않은 자가 겪는 몰상식이 괴로움이다. 문명시대초기에는 책이 흔하지 않고 주로 구전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대사를 외워서 극으로 연출할 수 있는 자는 엄청나게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시민들이 노천 극장에서 이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독서를 대신해 자신들의 마음가짐을 다듬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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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타부를 건드리지 말라. 신화시대 수만년의 저주가 그대에게 뿌려지리니. <금기 사항/ Taboo>

번영한 공동체의 뒤에는 반드시 비극의 힘이 있다. 타부 즉 금기사항의 힘 말이다. 사람은 세가지 돗대로 인생을 항해한다. 맨 앞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자신만의 우선 순위라는 돗대. 중간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바로보며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균형감각이라는 돗대. 그리고 맨 뒤에서 갑작스러운 돌풍에 흔들이지 않게 잡아주는 금기사항이라는 돗대이다. 언제나 가장 힘든 바람은 뒤에서 오는 뜻밖의 바람이다. 지금까지 세계는 말을 잘 타던 기마집단이 주름잡던 시대와 배를 잘 다룬 해양집단의 시대가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주고 받았다고 보면 정확하다. 모두 기동성에 최고의 우선 순위를 두었다. 여기서 늘 타겟이 된 대상은 자리잡고 멍하니 앉아 있는 집단이다. 무조건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는 것에서 이익이 생기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일리아드’, ‘오딧세이’가 무엇인가. 전자는 트로이 전쟁을 떠나는 이야기이고 후자는 귀환하는 이야기이다. 인류의 모든 이야기는 떠나고 돌아오면서 하는 사랑이야기이라고 보면 된다. 그만큼 인류는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동경했고 간절히 귀환하고자 했다. 이때 늘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세가지 돗대를 상징하는 마음가짐이다. 이것을 본부장은 나의 경험으로 터득한 선장 리더십이라고 해서 부하들에게 많이 강조했고 스스로도 늘 다짐했다. 선장 리더십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타부를 지키는 것이다. 배를 타는 사람들이 육지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경건한 이유다. 항상 눈앞에 펼쳐져 있는 변수인 바다가 그들을 경건하게 만들고 조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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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로버츠, 검은 남작 <바롤로뮤 로버츠/Bartholomeu Roberts>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해적이라고 하면 엄청나게 나쁘고 타락한 집단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매우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집단이다. 목적을 향해서 주도면밀하고 계획성 있는. 그렇다고 해적이 무슨 엘리트들의 집단은 아닐 것이다. 해적질을 하다가 군사 엘리트가 된 프란시스 드레이크 (Francis Drake)의 경우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없으니 말이다. 비슷한 게 한두 명이 있기는 한데 본부장이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 이야기해주면 바로 바롤로뮤 로버츠(Bartholomeu Roberts)다. 해적선장으로는 드물게 해군제독이라는 특이하지만 최고의 권력을 가진자가 프란시스 드레이크였다면 일반적인 관점 즉 해적들의 롤모델로서 최고의 성공을 한 선장이 바로 이 사람이다. 위대한 로버츠라고 또는 블랙 바트(검은 남작)이라고도 불렸다. 해적선장인데도 술을 마시지 않고 모든 일의 처음과 끝에 항상 신에게 기도하였으며 매우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드레이크가 열정을 상징한다면 로버츠는 절제를 상징한다. 본부장이 뭐라 했는가. 내일이 예측되는 절제된 사람에게는 돈과 여자가 따른다 하지 않았는가. 이 둘은 참고로 알아만 두자. 하지만 그들도 엄연히 바다라는 무시무시한 변수에 자신의 인생을 의지한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본인들의 개인 성격과 상관없이 언제나 선상에서 지켜야 할 규율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심지어 해적선이 일반 상선이나 군함보다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분위기였다는 것도 알아두자. 없이 사는 사람들끼리 내일 죽을 지도 모르는데 자기들끼리라도 편하게 해주었던 것이 아니라 나름의 민주주의적인 규칙이 엄격했다고 한다. 주로 의사 결정을 투표로 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해적선장은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 받은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존경 받을만한 인격과 바다 같은 마음으로 선원들을 대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잘나가는 다국적 기업의 리더십은 해적선 리더십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을 보고 실제 성공하는 리더십의 맛을 잠깐 보기 바란다. 물론 잭 스패로우가 까불거리는 건 빼고 말이다. 그건 본부장 스타일에 영 맞지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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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캠벨의 <신화와 함께 하는 삶>

본부장은 개인적으로 앞서 말한 유무형의 그리스 유물은 현재 발칸반도 끝에 위치하고 1832년에 런던 의정서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400년만에 독립한 나라인 그리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따르고 지키는 현대 문명은 그리스 로마 문명에 매우 큰 신세를 지고 있다. 따라서 모두가 존경하고 공유해야 할 보편적인 유물이지 한 나라의 소유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유물을 탄생시킨 그리스에게 전 세계인은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비극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서 말이다. 현재까지 잘 알려진 그리스 비극의 작가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더 있었겠지만 알려진 것은 그렇다. 지금으로 말하면 방송작가다. 읽어보면 면면히 주옥 같은 명작이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스 로마 시대 이전은 신화시대다. 그리스비극은 그 기간이 얼마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기록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온 보석같은 금기사항(Taboo)을 은유를 통해 전해준다. 그리스 비극을 일부 학자들은 '인류와 역사를 위한 애도'라고 말한다. 훌륭한 말이다. 인류라는 존재로 지구상에 나타나 살면서 겪은 모든 비극에 대한 애도를 말함이다. 참고로 조지프 캠벨의 ‘신화와 함께하는 인생’과 캐런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를 읽어보길 바란다. 문명시대 이전의 인류가 가지고 살던 상징과 철학의 기원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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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멋진 인간 <율리시스>

앞서 말한대로 이제 30년만 지나면 인류는 인공지능 로봇에게 지구를 빼앗길 수 밖에 없다. 머지않아 지적 이니셔티브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믿지 않고 로봇을 믿는 결과다. 좀 더 위대함이 아니라 좀 더 편한 세상을 갈구함이 만들어낸 비극일 것이다. 아폴로 계획같은 것은 이제 인류에겐 그저 부담스럽기만 하고 당장 내게 주는 것 없는 쓸데없는 짓이다. 누구도 손안에 있는 세계로 함몰되길 바라지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간접경험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점점 리얼에서 멀어져가고 자신이 사는 이 3차원의 세상마저 스스로 떠나려 하고 있다. 이미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그리고 아서 클라크같은 SF작가들이 예측하듯이 인간은 나중에는 정신적인 존재만 남는다고 한다. 육체가 주는 불편함을 버리고 말이다. 그리고 만화 ‘은하철도 999’의 거리의 불쌍한 소년 철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고 인공지능 로봇의 길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게 현재의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종합하여 추론하면 나오는 정확한 결론이다. 영생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바다의 여신에게 그토록 단호했던 율리시스와는 다르게 현재를 사는 우리 인류는 매우 나약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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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 <그리스 비극>

본부장이 그토록 그리스 비극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수 천 수 만년 동안 인간이 겪은 모든 비극을 손짓 발짓 그리고 DNA로 전승해온 금기사항(taboo)은 결국 우리를 그저 인습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4차에 걸친 생산성 혁명(증기/전기/컴퓨터/빅테이터)을 통해 이렇게 나약해져만 가는 인류를 위해 우리 조상들이 우리를 위해 남겨준 최후의 방패다. 문명시대 이전 수 천 수 만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자에 기록된 것이 없으니 말이다. 문자에 기록되지 못하면 인공지능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럼 반응할 수 없는 것이다. 신화의 시대 그리고 소위 축의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현재의 우리가 믿는 종교와 관습 그리고 사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은유와 비유 그리고 상징으로만 전달받은 신화 시대의 금기사항이 우리 인류를 태초의 인간으로 온전히 남겨두기만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아직 이니셔티브가 우리에게 남아있다면 말이다.

[정민우 청년의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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