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관지 (一以貫之)

존중과 배려의 사회를 위한 신앙의 역할

  • 입력 : 2017.01.18 16:36:34    수정 : 2017.01.18 16: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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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의 ‘2015 인구 총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있는 사람은 2155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44%에 해당한다. 즉, 국민의 56%는 종교가 없으며, 지난 10년간 종교가 있는 사람의 수는 9%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고, 탈권위주의적인 사회현상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종교인의 수가 줄어든 것이 사회 발전에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여러 종교의 핵심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자비를 의미한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모든 신앙이 추구하는 덕목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전쟁이 아닌 평화를 이뤄야 하며,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공통적인 계명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을 인간이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순응이다. 절대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를 흠숭 한다는 것은 ‘나’라는 이기적인 존재가 이 세상의 최고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믿는다면, 내가 내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가서는 안 되고 남을 존중하고 나와 내 가족을 넘어서 더 큰 공동체인 사회나 이웃을 위한 삶이 의미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절대자의 존재는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모든 종교가 ‘겸손’을 중요한 미덕의 하나로 여기는 이유다.

우리나라 종교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것이 사회 전체로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가 모든 사고의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경외해야 할 존재가 없기 때문에 나의 사고나 행동에 있어서 기준은 오로지 ‘나’이다. 이는 자칫 나를 제외한 타인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타인은 ‘세상의 기준이 되는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이므로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일뿐이다. 이러한 사고의 극단은 유물론이며, 이는 곧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폭력성의 출발점이다. 결국 종교 인구의 감소가 사회를 정서적으로 빈곤하게 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다양한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어떤 특정 종교의 신자 수가 줄거나 늘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여 겸손해지고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지향하도록 해야만 한다.

참된 인정이 넘치는 존중과 배려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종교의 역할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종교 단체가 다양한 형태의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지만, 겸손과 배려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길러져야 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신앙 활동을 통해 바람직한 심성을 기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입시위주 교육제도하에서는 많은 시간을 정기적으로 종교 생활에 할애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학생이 원하는 종교의 가르침과 철학을 배우거나 강연을 듣는 것을 봉사활동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어떨까? 절이나 교회, 사원 등이 신앙의 순수한 의미와 올바른 인성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학생은 그 시간에 참여하여 봉사 시간을 인정 받는다면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목적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배타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이 원한다면 다양한 종교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종교를 진부한 구시대 유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종교 간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인간을 위한 일치와 치유의 원리를 밝히는데 공헌했다. 이제 종교와 학교 교육이 배타적인 도그마에 갇혀 있지 말고 존중과 배려의 사회를 이루기 위한 공동의 노력에 더 매진해야 한다.



[김보원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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