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관지 (一以貫之)

소크라테스가 서울에 온다면

  • 입력 : 2017.03.30 14:24:26    수정 : 2017.03.30 14: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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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소크라테스가 2017년 3월 서울에 온다면 ‘자신에게는 무한히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한 우리의 이율배반을 향해 일갈할 것이다. 정치의 계절인가, 정치인들이 앞다퉈 ‘법과 원칙’을 강조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생경하게 느껴진다. 각종 청문회나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정치인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제 그러한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정치인 스스로가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엄격한 칼날을 마음껏 휘둘렀기 때문이다. 칼은 주인을 모른다. 언젠가 그 칼끝이 향하는 방향을 바꿔 자신의 목을 겨눌 때, 정치인의 표정은 어떻게 변할까? 칼로 흥한 자 반드시 칼로 망한다는 격언도 무섭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현재(NOW)’만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에고(ego)를 강화시켜 스스로를 파멸시킬 뿐이다. 지나치게 미래를 걱정하면 결국 현재를 소홀히 하고 결과적으로 미래를 망치게 된다. 톨레의 조언에 따라, 우리도 과거를 잊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1년 우리 사회는 과거라는 지독한 껍질을 깨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부정청탁금지법, 소위 김영란법은 사회의 잘못된 통념이나 관행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서슬 퍼런 칼날이었다. 스승의 날 생화 카네이션을 받으면 범죄자가 되고 종이로 만든 것은 괜찮다는 웃지 못할 유권해석이 이 법의 편집증적 경직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거의 모든 국민이 잠재적 범죄자로 감시 받아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했지만,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부정부패는 극약처방을 통해서만 없앨 수 있다는 대의명분에 모두가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 각자가 우리의 어두운 버릇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법은 소위 권력의 최고 정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그러나 역시 대한민국 국민은 그러한 예외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급기야 얼마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실현됐다. 탄핵이라는 또 다른 ‘김영란법’으로 최고 권력자마저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것과 비견될 수 있을까? 결국 김영란법의 정신이 사회의 온 계층, 서민에서 최고 권력자까지 예외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리 스스로 한치의 도덕적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법과 원칙’의 수호자임을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함의를 지닐 것이다. 우리 스스로 호랑이 등에 올라탔고 마구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서로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고 있다. 그래, 이제는 더 이상 좌고우면 할 수 없다. 엄청난 사회 혼란과 분열을 겪으며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이렇게 된 이상 이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사회, 가장 투명한 경제, 가장 고결한 문화를 만드는 처절한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톨레가 오직 현재(Now)만이 중요하다고 한 것처럼, 과거는 잊자. 살을 에는 고통을 자처한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책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과거 같으면 통념, 관행, 혹은 통치행위라는 모호한 말로 피해갈 일들을 이제 우리 서로 용서하지 말자고 사회적인 약속을 한 것 아닌가? 자, 이제 불평하지 말자.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등을 즐기자. 이제는 우리 모두가 호랑이 등에서 떨어져 호랑이 발에 밟혀 죽거나, 호랑이를 길들여서 세상을 향해 포효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 가능하다. 결국 우리의 선택이었다. 후회할 겨를이 없다. 나 그리고 우리 자신을 알자!

[김보원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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