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모든 장소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 입력 : 2017.11.14 11:27:54    수정 : 2017.11.14 20: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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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지금은 물자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다. 물자가 부족해 수요가 넘쳐 나던 시절에는 그저 물건만 잘 만들면 오케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필요한 것 이상을 생산하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시대’를 살아 가고 있다. 대형마트의 쇼핑카트도 모자라 온라인쇼핑몰의 장바구니마다 물건들이 가득가득하다.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고 소비를 유혹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TV만 켜도 세상의 온갖 여행지를 소개하고,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는 것이지 다리가 떨리면 가고 싶어도 못 간다며 인생은 한번뿐이니 지금 당장 짐 싸서 떠나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디 안가도 된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난 어디 돌아 다니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 봐도 어릴 적부터 그랬다고 한다. 이상하게 어린 애가 어디 놀러 가면 더 있자고 하는 게 아니라 빨리 집에 가자고 그렇게 졸랐다고 한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나랑 비슷한 사람이었나 보다. 떠나봐야 별 것 없다고 이렇게 초를 친다. 이 사람이 쓴 시 중에 ‘항해’라는 시에서는 아주 작심하고 초를 친다.

“우리는 별들을 보았지/파도도 보았지, 모래도 보았지/그러나 수많은 위기와 예측 못했던 재난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자주 따분했다네,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내 개인적인 취향은 별도로 하고 멀쩡한 물건이 있는데도 새로 물건을 사게 하고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도 사게 하는 소비의 사회를 이끌어 가는 업자의 자세로 돌아와서, 어떻게 하면 떠나게 할 것인가를 얘기해 보자.

“그저 만족스러운 비누를 만드는 것은 부족하며 다들 씻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

슘페터라는 유명한 경제학자가 한 얘기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물자가 부족하지 않은 세상, 그 속에서 투쟁하는 업자들은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결국 ‘씻고 싶은 마음’ 즉 떠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해야 한다.

먼저는 매스마케팅이 있었다. 평균적인 제품을 평균적인 사람에게 왕창 팔아야 한다. 어떻게 할까? TV에 30초 광고를 한다. 그럼 사람들이 산다. 그렇게 팔아서 다시 광고를 한다. 그래서 또 판다. 한때는 이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아니라고들 한다. 소위 말하는 ‘콘텐츠 마케팅’의 시대다.

미국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갔었다.

여행사의 패키지여행이다. 어떤 부둣가에 버스가 서더니,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가이드가 설명을 시작한다.

“저쪽에 보이시는 섬이 그 유명한 ‘알카트라즈’ 섬입니다. 영화 더 록(The Rock, 1996) 보셨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섬이 잘 안 보인다. 가이드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자세히 한참 보니 저기 멀리 아주 작은 섬이 하나 있기는 하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광객들이 부둣가에 서서 연신 사진을 찍는다.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섬을 배경으로 해서,

강원도 태백시를 가면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를, 인천시를 갔더니 거기 공무원은 드라마 ‘도깨비’를 얘기하더라.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콘텐츠’의 힘이다.

TV의 맛집 프로그램을 봐도 홀에서 그냥 맛있게 먹는 손님과 음식만 보여 주지 않는다. 주방 안까지 들어 가서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무슨 비법 재료를 쓰는지 등을 보여 준다. 여기서 더해 신선한 해산물이 수조차에서 내려 주방으로 옮겨 지는 장면에서 더 나아가 아예 식재료가 생산되는 곳까지 가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불암 선생님이 나오는 ‘한국인의 밥상’처럼,

‘매스 마케팅에서 콘텐츠 마케팅으로’, 그 배경에는 ‘인터넷’이 있다. 과거 TV라는 미디어만 있을 때에는 제약이 있었다. 15초에서 30초라는 짧은 시간의 제약이 그 첫 번째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콘텐츠를 보여 줄 수 있는 미디어가 없는 공간의 제약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 나의 콘텐츠를 고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많은 매체가 있다.

여기서 결론으로 이런 세상이니 바이럴 마케팅, 온라인 마케팅, SNS 마케팅을 해야 합니다 라고 하면 너무 많이 들은 얘기라 식상함을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약간 다른 쪽으로 얘기를 해 보고 싶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 얘기를 했는데도 이런 장소들은 첨엔 반짝하지만, 그 콘텐츠의 힘이 오래가지 못한다. 그 힘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콘텐츠를 생산해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다. 하나의 좋은 대안이 있다.

남산에 가면 수많은 자물쇠를 볼 수 있다. 연인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고 싶어서 남산을 간다. 드라마 등에서도 많이 등장했다. 특정한 장소에 자신들만의 콘텐츠를 남기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오프라인 UCC’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상당히 매력적인 대안인데 문제가 있다. 이 자물쇠가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슨다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사랑의 자물쇠는 결국 흉물이 되어서 철거했다고 한다. 시간을 이기지 못하는 대부분의 우리네 사랑처럼,

이 칼럼의 제목을 다시 보자. ‘모든 장소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 서론이 길었다.

개인적인 얘기로 나의 아버님께서는 은퇴하시고, 전남 함평에 있는 폐교를 매입해서 펜션과 식당을 운영하고 계신다. 어느 날인가 초로의 노신사께서 학교 운동장에서 예전 초등학교 건물을 물끄러미 보고 계시더라. 아주 오랫동안, 아주 천천히......

“어르신, 이 곳을 아세요?”

잠시 회상을 멈추신 그 초로의 노신사는 얘기하더라.

“내가 이 학교 1회 졸업생이야, 일제시대에 우리 마을에 이 초등학교가 생기고 내가 이 학교를 다녔어”

장소는 이처럼 우리 인생의 소중한 순간순간들을 박제된 모양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박제된 순간들을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살며시 보여 준다.

광주의 5.18 기념 공원 같은 곳에 높은 분들이 방문하면 방명록을 적는다. 그 장소에 자신의 감상을 남기는 것이다. 김해의 노무현 대통령이 잠드신 곳도 그럴 것이다. 누구나 그 곳에 가면 자신만의 감상이 생기고 그걸 남기고 싶을 것이다. 자주 갈 수 있는 동네 뒷산이 아니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방문이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특별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굳이 높은 사람이 아닌 나 같은 평범한 시민일지라도,

여러 지자체 관광과에 우리 회사가 제안하는 것은 이 장소에 ‘가상의 담벼락’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름은 “메모리 월(Memory Wall)”, 녹이 슬지도 않고,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도 없어 누구나 그 담벼락에 자신의 방명록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조건은 딱 한가지다. 그 장소를 방문해야만 그 담벼락에 글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방명록이니까,

자신의 옛날 초등학교를 보면서 추억에 잠기고, 아마도 그 추억은 지금 초등학생인 사랑하는 손자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손자에게 나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 바로 이 장소에다 말이다. 흉물스런 낙서가 아니라 깔끔하게 ‘가상의 담벼락’에다 적는다.

“사랑하는 철수야, 이곳이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꿈을 꾸던 학교란다. 우리 철수가 자신의 꿈을 맘껏 펼치기를 할아버지는 응원한다. 꿈을 잃지 말고 항상 정진해 주길 바란다. 우리 철수, 할아버지가 많이 사랑한데이.....”

시간은 우리 곁을 흘러가지만, 장소는 그곳에서 우리가 떠난 후에도 그대로 있다. 메모리 월은 그렇게 그곳에서 당신을,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박승하 댓츠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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