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의 그림극장

상실과 기억, 그리고 사랑 - 박선기 작가와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 입력 : 2017.08.02 20:18:55    수정 : 2017.08.02 20: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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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내게 남아있는 그녀의 기억은 어디로 가는 거지?”

한 남자가 있다.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평생 한 직장을 다니며 적당히 무심한 남편이자 적당히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살아왔다. 시간은 부부를 익숙함으로 이끌었다. 서로의 역할에 충실했고, 세 자녀는 성실한 삶의 보상처럼 출가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부부만 남은 한적한 소도시에서, 어느덧 노년에 이른 자신의 모습을 목도했을 때 즈음 죽음의 그림자는 성급하게 남자 곁을 드리웠다.

도리도스 되리가 메가폰을 잡은 독일영화 <사랑 이후에 남겨진 것들>은 생의 마지막 시기, 반려자의 죽음을 앞두고 여행을 선택한 노부부의 이야기다. 부부는 남자의 시한부 판정을 숨기고 자녀들을 보기 위해 베를린으로 향하지만, 헌신으로 키운 자식이라 한들 이미 각자의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만큼 자라버린 자식들에게 노부모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자식들과 손주들의 불편한 기색에도 섭섭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부부의 모습은 자식을 향한 한없는 사랑에 늘 약자가 되고 마는 부모의 가슴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땐 시간이 많을 줄 알았지”

아내 트루디는 살아생전 일본 춤인 부토를 좋아했다. 아내가 경외했던 춤이지만, 아방가르드한 모양새가 내키지 않아 못하게 했던 남편 루디였다. 아내는 일본을 여행하고 싶어 했지만 함께 일본 여행을 해보기도 전에, 여행지에서 트루디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이미 생의 황혼기에 이른 이들에게 죽음은 순서가 없었다.

‘언젠가는’ 아내와 함께 일본을 여행하려 했지만, ‘언젠가는’ 이란 막막한 기약에 야속하게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내가 잠든 호텔 복도로 남편의 오열이 굉음처럼 번진다. 남편의 가슴에는 짙은 그리움과 연민, 자책감이 녹아내린 바다가 해일이 되어 밀려온다. 집안 곳곳에 남은 아내의 흔적을 더듬다 후지산에 관한 아내의 책을 발견한 루디. 책은 루디의 등을 떠밀었고, 루디는 그리움 속에 흩어져 있는 감정들을 가방에 채비하고 길을 떠난다.

루디는 휘황한 일본 밤거리를 넋 나간 사람처럼 걷는다. 의식하지 못한 채 아내의 세상 속에 살고 있던 남자의 마음은 탕자가 되어 아내의 빈자리를 배회한다. 남편의 두터운 코트 속에는 아내 트루디의 옷이 있다. 아내가 떠난 자리를 그리움으로 채우고,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함께 여행을 한다. 그리움이 결국 아내이다. 기억은 함께 있다. 루디는 트루디가 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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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기. Point of view 08-07. 2008. 태운 나무.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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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인 소재에 천착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박선기는 숯을 주조로 한 인스톨레이션, 시점을 교란시키는 작업을 선보이며 한국 미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작가다. 숯과 불에 탄 나무 등 자연적인 재료는 재료의 근원에서부터 생성과 소멸에 대한 철학적 상징을 함의한다. 박선기 작가의 작품 는 시점을 교묘히 비튼 작업으로, 결국 보고 싶은 대로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모습에 질문을 던진다.

태운 나무로 제작된 작품은 죽은 아내의 흔적을 채비하고 여행길을 떠난 루디를 연상케 한다. 생명이 다한 듯 까맣게 타버린 여행가방과 중절모, 우산은 루디의 유품처럼 먹먹한 모습이다. 소멸하였지만 소멸이 끝이 아님을 은유하듯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의 단편처럼 작품은 견고하게 서있다. 루디는 죽은 후 아내를 사랑했던 감정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했다. 죽은 자의 기억을 켜켜이 채비한 루디의 가방처럼, 작품의 여운은 죽음 이후에 남은 기억의 알맹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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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덧없음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

루디는 벚꽃이 흐드러진 공원을 걷다 부토를 추는 거리의 소녀 유를 만나고 친구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유와 후지산으로 간 루디는 아내의 기모노를 입고 부토를 추며 비로소 아내의 품으로 떠난다. 생전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아쉬움도, 아내를 더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부토의 몸짓에 담아 보내며 그림 같은 마지막 순간을 맞는다.

시간이 많을 줄로 알지만, 늘 지나고 난 후에야 가슴을 치는 것이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말자. 그 언어의 홀씨가 훈풍에 실려 가슴에 날아가고 마음의 품에서 잉태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그로 하여금 삶에서 미련 없이 사랑했다는 증거를 충만하게 품에 안고 눈감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다만,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 시간이 산자의 일생을 찌르는 가시가 되지 않도록. 타버린 나무가 죽음으로 소멸하는 아닌, 숯이 되어 다시 남겨진 자의 가슴에 따뜻한 군불을 지펴줄 수 있기를.

[김지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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