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푸른 화살표

[서석화의 푸른 화살표] 사람은 시간을 따라간다

  • 입력 : 2017.07.28 19:24:45    수정 : 2017.07.31 19:48:40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문득.

문법상으로 부사이며 생각이나 느낌 따위가 갑자기 떠오르는 모양.

늘.

문법상으로 부사이며 언제나 항상.
 기사의 0번째 이미지

ⓒ pixabay



어느 날부터였다.

‘문득’이 ‘늘’이 되는 일이 자꾸 늘어났다. 거꾸로 ‘늘’이 ‘문득’으로 내게서 멀어져 가는 일도 자꾸 늘어갔다.

어쩌면 그런 일은 살아오는 동안 반복해서 겪어온 일상이었을 것이다. 지나온 세대에 따라, 처해진 상황에 따라, 그 시절에 옆에 있던 사람에 따라, ‘문득’이 ‘늘’이 되고 또 그 반대가 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무심코 흘려듣는 심박동 수만큼이나 ‘늘’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고 내 생각과 감정을 조종하던 어떤 일이 어느 날, 아무런 사건이나 동기가 없었음에도 까마득하게 저편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이젠 불러내야만 어색하게, 그것도 잠시, ‘문득’ 나를 찾아온다.

반대로 어쩌다, 그것도 부르고, 찾고, 마중 채비를 갖추고서야, ‘문득’ 내 시선 안으로 들어오던 일이 어느 날, 두 팔과 두 다리 길게 뻗고 엎드려 그림자처럼 나를 떠나지 않는다. 고개를 젓고 몸을 뒤틀어도 ‘늘’ 정면에서 내 시선을 끌어간다.

나이가 들고 있었다.

중요한 것의 순위가 바뀌고,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의 농도가 바뀌며, 얻고 싶은 것과 버려도 좋을 것들의 종류가 바뀌는 경험 속에 나는 그렇게 나이 들고 있는 나를 만났다.

절대적으로 나를 지배하고 내 삶의 만 가지 끈을 다 쥐고 있는 것 같았던 일이 이젠 단 오 분도 나를 차지하지 못한다. ‘사람’과 ‘욕망’과 ‘사랑’, 거기에서 비롯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급행열차 탑승권이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어쩌다 채 버리지 못한 탑승권을 발견하게 되는 날에도 이리저리 돌리다가 무심코 멈춰놓은 TV 채널에 ‘문득’ 시선이 가는 정도, 중요했던 것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변해버렸다.

대신에 아주 뜸하게 말 그대로 어쩌다 문득 그것도 잠시 마음을 멈추게 했던 ‘버림’과 ‘내려놓음’, ‘반성’과 그 종착지라고 할 수 있는 ‘죽음.’

작년에 어머니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생사의 이별을 정말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내는 고통으로 겪어서일까? 어떻게 남은 생을 살며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과 세상과 모든 인연을 떠날 것인가 하는 생각은 잠 잘 때조차도 온몸의 핏줄을 돌며 하룻밤에도 몇 차례나 나를 깨운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은 그 시간에 필요한 모든 감정을 제자리로 배치하고 정돈한다.

살아온 시간의 테가 늘어나고 두고 온, 갖지 못한, 꿈이며 사랑이란 것들도 나이가 들어가며 ‘문득’ 떠오르는 정도에 밀쳐놓을 수 있는 대신에, 이젠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준비로 두고 갈, 가질 수 없는, 욕심이며 집착 등을 버리는 연습을 ‘늘’ 하게 됐지 않은가.

‘문득’과 ‘늘’만 따라가도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상황이 내 배경이 되어 있고, 추상적이던 행복과 불행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보이는지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그러면 그것은 잊혀도 좋은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이고 귀한 목록에서 삭제해도 아쉬울 것 없는 것이다.

‘늘’ 떠올라 가슴에서 바글거리며 나를 채근하는 무엇이 있는가.

그러면 그대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다. 살아갈 이유이며 기도이고 남은 더운 피로 따뜻하게 데워야 할 귀한 것이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 pixabay



시간은 지금도 지나가고 사람은 그 시간을 따라간다.

지금은 또 어제가 되고 내일 우리는 또 어떤 감정의 끈을 ‘문득’과 ‘늘’에 매달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않은가.

“어제여서 다행이다... 내일이 있으니 더 다행이다...”

감정의 파고가 높았을수록, 스쳐 지나온 벽이 차갑고 두꺼웠을수록, 하루하루가 위태롭고 위중했을수록, 지나간 ‘어제’는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지금 춥고 아프며 슬픈 사람, 손대는 곳마다 쩍쩍 얼음이 되어 사방이 빙산처럼 날카로운 한기에 질려가는 사람, 그들에게 다가오는 ‘내일’은 햇살과 온기와 맑은 죽처럼 역시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문득, 그리고 늘...

어제, 그리고 내일...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서석화 시인]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