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관지 (一以貫之)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녹취에 중독된 한국 사회

  • 입력 : 2017.04.20 17:34:05    수정 : 2017.04.20 17:35:55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스티브 잡스가 사후에 신을 마주 했다면, 신은 그를 칭찬했을까 야단쳤을까? 스마트폰은 인간에게 편리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단점도 지닌다. 무분별한 녹음과 도촬은 그러한 단점 중 심각한 것에 속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가히 녹취에 중독된 사회라 할만하다.

강의와 연구에만 익숙하던 내가 학교의 기획 관련 보직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바쁘게 걷던 나에게 모 신문사 기자의 전화가 왔다. 통화를 할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끊으려고 하다가, 학교 일을 성실하게 알려 주자는 선의를 가지고 인터뷰에 응했다. 기자는 그 당시 학교에서 추진 중인 정부와의 특정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사실 그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 중이었다. 따라서, 나의 방점은 “전통적인 학문과 최첨단 과학이 결합하는 융복합 연구의 의의와 이를 위한 대학원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어떤 의도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기자는 이 사업이 결정되고 정부 예산에 확정적으로 반영되었는지를 확인 받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하지 않은 예산관련 얘기는 내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고 기자가 제시한 숫자의 대략적인 규모에 대한 소극적인 대답만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내 휴대폰은 통화 녹음 기능이 없어서 기억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다음날, 아침부터 학교 보직자들에게서 전화가 밀려왔다. 이 사업이 확정되어 내년 예산에 반영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정부의 유관 부서에서 불만과 질책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예비타당성조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언론플레이를 한다면서 사업 자체의 폐기를 고려 중이라는 말도 돌았다. 학교 홍보실에서는 내가 나서서 기자에게 기사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기자님, 제가 어제 인터뷰한 의도는 이 사업의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었지, 예비타당성조사도 마무리되지 않은 사업의 예산 규모나 그 확정 여부를 밝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사 중에 나오는 예산 규모나 확정 반영 등 표현은 정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지만, 기자는 답이 없었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겨우 통화가 이루어졌으나, 기자의 목소리는 인터뷰를 요청할 때와는 다른 냉랭한 톤이었다. 왜 이리 호들갑이냐는 투였다. 내가 전후 사정을 말하며 정중히 기사의 수정을 다시 요청하자, 귀찮은 듯이 돌아온 대답은 “통화 내용을 녹음해 놓았습니다”였다. 그리고는 다른 곳에서 전화가 왔다며 기다리라 하더니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도 “대화를 녹음했다”는 기자의 말은 순간적으로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 동의 없이 대화를 녹음한 것은 부당하다. 내가 했던 말을 기자에게 유리한 일부분만 발췌하지 말고 전체를 내 놓아라”고 요구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실수로 인해 학교의 중요한 사업에 차질이 빚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정부의 관련 부서 담당자에게 달려가서 사정을 설명하며 여러 차례 사과를 했다. 절대로 고의나 언론플레이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평교수일때는 정부의 실책에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이제는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반성하며 벌을 서는 것 같은 묘한 기분도 들었다. 결국 학교에서 정정 보도문을 배포했고, 정부의 오해가 풀렸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이 일련의 해프닝을 겪은 후 그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모든 것은 내 순진한 어리석음의 결과다. 언론플레이를 한다며 정부에서 오해한 것도 이해되고, 다른 한편으로 나의 해명을 경청해 준 담당 공무원이 고맙기도 했다. 나를 곤혹스럽게 한 기자를 원망할 필요도 없으며, 그도 어떤 의도였던 간에 자신의 할 일을 했을 것이라 믿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내 부덕의 소치 때문에 절치부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듯하다. 나는 그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다시는 응하지 않을 것 같다. 설사 인터뷰를 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기자는 어딘가에 숨긴 녹음기로 나의 말을 녹음하고 그것이 언젠가 나를 또다시 곤혹스럽게 할 것이라고 의심하며 말할 것이다. 신뢰가 있다면 더 알려줄 수 있는 사실도 깊숙이 감출 수 밖에 없다. 그 기자는 진실을 알고 싶겠지만, 그의 행동은 진실을 감추도록 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가 우리의 언행을 녹음이나 녹화하고 있다고 늘 경계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공동체로서 우리는 정녕 ‘만인의 만인에 대한 녹취’가 만연한 사회를 원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사회적인 합의를 해야만 한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당사자의 명시적 동의가 없는 어떠한 녹취도 법적,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의 그림자가 수많은 개인의 스마트폰을 빌려 2017년의 한국 사회에 어른거리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김보원 카이스트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추천 기사